얼마 전 일간지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 가장 큰 정신적 충격을 받는가 하는 통계조사 결과가 발표된 일이 있었다. 그에 의하면 자식이 죽었을 때에 가장 큰 충격을 받는다고 되어있다. 애인이나 배우자가 사망했을 때 더 큰 충격을 받을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았다. 이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정이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단적으로 말해준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나의 부모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다.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보면 부모가 자식을 낳아 기르는데 “열 가지 은혜”를 열거하고 있다.
첫째, 아이를 배어 지키고 호위해 준 은혜
둘째, 해산할 때 괴로움을 받은 은혜
셋째, 자식을 낳고 모든 근심을 잊은 은혜
넷째, 좋은 음식만 골라 먹인 은혜
다섯째, 진자리는 자신이 눕고 마른자리 골라 눕힌 은혜
여섯째, 젖 먹여 기른 은혜
일곱째, 손발이 닳도록 씻어주고 깨끗이 해준 은혜
여덟째, 먼 길을 떠남에 염려하는 은혜
아홉째, 자식을 위하여 어려운 일을 마다 않고 기꺼이 한 은혜
열째, 끝까지 자식을 사랑하고 측은히 여긴 은혜
어디 이 뿐이랴! 자식이 어버이가 되어 제 자식을 길러보기 전에는 그 애틋한 사랑과 노고를 알 길이 없다. 부모의 은공을 진실로 안다면 그 숭고한 사랑에 감사하고 보답하고자 아니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율곡이 “무릇 사람 된 자로 마땅히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로되 진실로 효도하는 이가 적은 것은 부모의 은혜를 깊이 모르는 까닭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를 지적한 말이다. 효(孝)란 부모의 은공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 즉, 감은(感恩)에서 비롯된다.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려는 보은(報恩)의 정이 효심(孝心)이고, 효심을 행동으로 옮기면 효행(孝行)이 된다. 효행이 정성을 다하면 효성(孝誠)이 되고, 효심과 효행이 자기의 품성을 이루면 효덕(孝德)이라 일컫는다. 이와 같은 효행의 도리가 효도(孝道)이다. 다시 말해서 부모의 은공을 알고 부모를 바르게 섬기는 도리가 효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일까? 조금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첫째, 부모를 정성껏 모시는 일이 효도이다.
공자는 제자의 물음에 “부모에게 옷이나 음식을 잘해드는 것은 효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소나 말을 소중히 기르는 것과 같다. 공경(恭敬) 하는 마음이 없다면 부모를 섬기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오늘날 물질만능의 풍조 속에서 부모를 모시는 사람들이 생각해봄직한 말이다. 의식(衣食)을 제공하고 용돈이나 드리면 자식의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둘째, 부모를 편하게 모시는 것이 효도이다.
「곡예(曲藝)」에 이르기를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모시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겨울에는 훌륭한 난방시설을 하고, 여름에는 냉방시설을 해드리라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겨울에는 더운 방을, 여름에는 시원한 방을 자식이 쓰는 데 있다. 부모를 편하게 모시는 길은 육신의 편함도 중요하지만 그 마음이 항상 편할 수 있도록 배려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효도이다.
짧은 일생을 기쁘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지상낙원이다. 따라서 부모를 즐겁게 해드리는 일이 가장 훌륭한 효도가 된다. 어느 부모든지 자식이 잘 되는 것이 최대의 소망이기 때문에 자식의 건강이나 사회적 발전은 결과적으로 부모에 대한 가장 큰 효도가 되는 것이다. 공자도 효경(孝經)에서 “사회에 나아가 행실을 바로 하여 이름을 날리고 부모를 영광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라고 하였다. 항상 평온한 얼굴로 부모를 대하는 일이나, 제철에 새로 나온 과일을 몇 개라도 정성껏 사다 드린다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이러한 일들이 모두가 효도하는 일인 것이다. 맹자도 “어버이에게 기쁨을 사지 못하면 사람이라 할 수 없고, 어버이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자식이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부모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도 효의 한 방법일 수 있다.
넷째, 부모를 연민의 정으로 대하는 것이 효도이다.
효의 기본요건은 진심으로부터 울어 나오는 부모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서 나이 들고 병들어 죽는 것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굴레 속에 자식을 위하여 희생만 하다가 노약해졌다. 이에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자식의 도리가 아니다. 부모의 희생은 실로 순수한 사랑이요 봉사다. 그런데도 그 은공을 모르고 노후에 무관심하다면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작은 은혜에도 보답이 있어야 하거늘 낳아서 길러주신 막중한 은공에 보답이 없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 배은망덕이야 말로 인간의 수치요 죄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섯째, 부모를 구심점으로 온 가족이 화합하는 것이 효도이다.
부모의 소망은 언제나 단란한 가정이다. 때문에 형제가 화합하여 서로 돕고 이끌어가는 우애 있는 가정, 어른을 섬기고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화목한 가정이 아니고서는 부모를 훌륭히 섬길 수 있는 가정이라고 할 수 없다.
현대사회는 고도의 산업사회로서 물량적 성장과 효율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가치를 포함한 윤리적 가치조차도 기능사회의 적응여부로 판가름하려는 가치체계가 형성되어 가고 있다. 오늘날 노인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것도 이러한 사고기준과 도덕률의 급격한 변화에서 오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적 사조의 흐름이나 현실이 핵가족 형성이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부모의 은공을 알고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 부모를 모시고자 하는 마음의 바탕이 필요하다. 우리의 현실은 서구의 가족제도만 받아들였지 그들의 사회보장제도나 노후보장 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활능력이 없는 부모를 섬기지 않는 것은 마치 수영할 수 없는 은인(恩人)이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을 모른체하는 살인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어는 부모도 신라시대의 손순(孫順)이나 향득(向得)과 같은 출천대효(出天大孝)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부모와의 세대차에서 오는 갈등을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이해했듯이 슬기로운 아량으로 이해하여 부모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해야 하겠다.
5월은 어버이날이 있는,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고 효도를 다짐하는 달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철의 시조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자.
어버이 살아 실제 섬길 일란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 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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