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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스크랩] 종교의 존재 이유

by scope 2005. 10. 26.
 

   

  며칠 전 이름 있는 한 스님이 쓴 연기(緣起)에 관한 글을 읽었다. 내용인즉 하나 같이 인간의 애환흉복(哀歡凶福)이 모두 연(緣)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 했다. 즉 이승에서 선하고 복 받아야 할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은 저승에서의 업보(業報)때문이라는 것이고, 심지어는 부모의 업보가 자식에게 연루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죄 없는 어린 생명의 죽음이나 고통은 그 부모가 저지른 업보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가 아니고는 선한 사람의 고통을 설명할 길이 없다. 왜?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했으니까....


  기독교에서는 이런 경우의 해답이 명쾌하지가 않다. 왜 선한 사람이 일생을 고통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가?  반대로 왜 사악한 사람도 영복을 누리며 일생을 무사히 마칠 수 있는가? 악한 사람이 잘사는 것은 신의 관용이라 하자. 그렇다면 선한 사람의 고통은 신의 무관심이란 말인가?  여기서 내세(來世)의 징벌(懲罰)에 관하여는 강도 높게 강조되고 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신의 영역은 현세(現世)에는 무력하단 말인가? 불완전하고 몽매한 이간들을 현세에서 무력하게 방치하고, 내세에 응징한다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어쨌건 인간은 불완전하게 창조되었고 정의와 모순이 혼재된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으리라. 그래서 하나님은 전능하지만 인간을 창조하는 데는 불완전한 부분이 있었고, 이 같은 불완전한 부분은 자연법칙에 지배받게 되는 것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불완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악과 흉복의 인과관계가 서로 직결돼 있지 않은 부분을 내세의 심판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도 이해되지 않는 참담한 실례들이 많다는데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천사처럼 착하고 나쁜 일은 조금도 하지 않고,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참기 힘든 고통이 왔다고 하자. 또 이 같은 고통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일생동안 계속된다고 할 때, 그에게 “현세란 아무것도 아니며, 내세를 위한 시험에 불과하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한다면, 죽음과 같은 고통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과연 설득력이 있겠는가?


  이러한 점에서 불교는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는 점에서 한 수 앞섰다 할까. 즉 이승의 모순은 전생의 업보이니 벗어날 수가 없다고 답하면 되니까. 그러나 전생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채 이승에서 저승의 업보로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자기의 잘못도 모르면서 혹독한 고문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구나 부모의 죄과 때문에 자식이 그 업보로 죽어가거나 고통을 받는다면 이 얼마나 불공정하고 모순된 일인가? 이 경우 그 자식에게도 그만한 전생의 업(業)을 안고 그 부모에게 태어난 것이라고 한다면 말은 된다. 그렇다면 불교신자도 아니고 불교와 무관한 사람까지 포함한 지구상의 50여 억 인구의 생로병사, 길흉화복을 모두 주재하는 신이 있다는 말이 되는데, 이 같은 엄청난 일을 해내는 권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과연 인정할 수 있으며, 불교 교리도 모른 채, 그러한 교리와 접할 기회도 없는 채, 더구나 이교도까지도 포함하여 이러한 굴레에 얽혀 있다는 사실이 설득력이 있겠는가?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과학적 합리성을 떠나서 내세를 믿고 현세에서 죄 짖지 않고 살려는 노력이 있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지 굳이 그것을 캐고 논증하려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고, 또 이승의 고통을 전생의 업보려니 하고 참고 견뎌 극복할 수 있고, 악연을 맺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힘이 된다면 다행한 일이지 구태여 그 합리성 여부를 가려서 무엇 하겠는가?


  또, 예수의 가르침을 본받아 모두가 선하게 살고 사랑을 실천한다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고, 지상에 평화로운 낙원이 이룩될 것이다. 그리고 불가(佛家)의 가르침대로 탐. 진. 치(貪. 瞋. 癡)에서 벗어나 모두가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시(布施)하고, 성불(成佛)을 지향(指向)하는 자세로 살아간다면 이상사회가 구현될 것이니, 이  또한 종교의 지향목표가 아니겠는가! 


  종교는 이와 같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교리(敎理)로 하여 그 합목적적 도덕성이 신앙의 타당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도덕적 토대 위에서 만이 건전하게 뿌리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칸트도 그러한 점에서 종교의 도덕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 같은 교리를 믿고 의지하며 내세를 기약함으로써 신앙에 의한 바른 생활규범은 물론이고, 고통을 극복하는 의지(依支)의 대상이 된다면 보람된 것이지, 이를 논증적 방법으로 끌어내릴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은 분야를 논증 불가의 형이상학적 분야로 치부하고 있지 않은가?  부당, 불합리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반증 또한 없기 때문이다.


  종교란 본시 그러한 것을 믿고 따르고 인정하는 무리들의 집합체이고, 정신적 안식처이며, 그 같은 신앙에서 얻어지는 정서와 행동양식으로 종교의 존재의미가 평가되는  것이다. 또 그러한 소신이 신앙의 명분이고, 공감대 형성의 요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종교의 공과(功過)를 따지는 일도 무의미하다. 다만 그 종교의 이념이나 교리가 현실적 도덕성이나 불변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되는 일이고, 혹세무민(惑世誣民)이 아니면 그 존재이유를 따져 시비의 대상으로 삼을 이유 또한 없다고 본다. 그렇게 믿고 선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 어떤 종교의 교리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다면 그러한 신앙을 갖지 않으면 되는 일이고, 그 같은 종교는 스스로 존폐, 성쇠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혹세무민의 종교적 폐해 문제는 대중의 의식수준이나 발전된 종교의 보편화 수준으로 보아 체질적인 면역기능이 형성되어 크게 우려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결론지어 말한다면 공인된 종교는 이러한 차원에서 존재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이며 권장할 이유도 있다. 이 같은 신앙을 모두 부정하고 신앙생활을 않겠다면, 또 종교 없이 신앙에 의지하지 않고도 자신의 삶을 바르고 강하게 이끌어 갈 수만 있다면, 굳이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이러한 사람은 종교인이 다른 종교를 비판할 필요가 없듯이 초연하게 자신의 소신대로 살아가면 되는 일이다.


  반드시 종교에만 선이 있는 것이 아니고 평범한 사회에도 권선징악의 도덕률이 있고, 그래서 신앙 없이도 얼마든지 바른 생활을 할 수 가 있기 때문이다. 또 종교인 중에도 비신자보다 못한 부당한 길을 가는 사람도 있지만 이 또한 전체 중의 한 분자로 이해하면 될 일이지 종교 매도의 대상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의 자유는 절대로 필요한 것이고, 어떤 종교가 혹세무민으로 사회의 기본 틀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면 간섭할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본다. 이 또한 종교의 자유이니까. 다만 건전한 종교가 건실하게 뿌리 내려서 종교가 그 사회의 선과 정의를 지탱할 지주가 되어 준다면 이상사회 건설의 큰 몫을 하게 될 것이고, 불확실한 내세를 확실한 현세에 구축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실질적인 종교의 지향 목표이기도 할 것으로 보여 진다.




 
출처 : grandfa의 blog |글쓴이 : grandfa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