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인류가 이룩한 가장 큰 기술적 변혁으로는 불의 발견과 그것의 광범위한 사용을 들 수 있다. 인류가 초기에
달성한 기술적 성과 중에 직조와 재봉 등은 이미 몇몇 동물들에 의해 선행되고 있었지만 불은 어떠한 동물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또한,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이 마찰에 의해서 불을 일으킨 것은 인류가 집단적으로 기술의 위력을 경험한 최초의 사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불이 가진 상징적
의미는 전기를 제2의 불이라 하고 원자력을 제3의 불로 칭하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불의 사용으로 인류의 생활과 기술은 급격히
향상될 수 있었다. 불을 사용하게 되면서 인간은 화로를 중심으로 일정한 장소에 모이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원시 공동사회의 형성이 더욱
촉진되었다. 또한, 불을 통해 음식물을 익혀 먹음으로써 인류는 역사상 최초로 다양한 음식의 맛을 즐기기 시작했고 기생충에 감염될 확률을
줄임으로써 보다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음식물을 조리하는 과정에서 인류는 가공법을 익히게 되었고 이것은 이후 과학 기술
발전의 원천이 되었다. 음식물을 끓이기 위해 점토 용기를 불에 구우면 단단해진다는 경험으로부터 고온 처리 기술이 습득되었고 이것은 이후에 야금
기술과 연결되어 금속 시대를 여는 실마리가 되었던 것이다. 공구가 물리적 과학 기술의 출발점이 되었다면 불은 화학적 과학 기술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2. 바퀴의 발명
바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발명 중 하나로 꼽힌다. 고고학적 증거들에 따르면 바퀴가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000년 경으로서, 탈것에 부착된 것이 아니라 도공(陶工)들이 사용하는 물레에 사용되었다.
바퀴달린
탈것을 사용했다는 가장 오랜 기록은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였다. 유사한 시기에 인도와 중국에서도 바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바퀴는 빠른 속도로 북서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처음에 바퀴달린 탈것은 의식(儀式)이나 행사를 위해 사용되었고, 곧 전쟁에 이용되었다. 바퀴달린
탈것이 물건을 나르는 데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약 1000년이 지난 후부터였다.
최초의 바퀴는 통나무를 원반 모양으로
잘라내어 다듬은 형태이거나 세 개의 널빤지를 서로 결합시켜 원형으로 깎은 형태였다. 이러한 바퀴는 오래 견디지 못하고 쉽게 부서졌으므로, 이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얇은 나무나 구리로 만든 테를 둘러 사용하였다. 기원전 2000년경에는 바퀴살이 달린 바퀴가 처음으로 나타나 이용되기
시작했다.
종래에는 바퀴의 사용이 불의 사용과 마찬가지로 곧 문명의 발전을 의미한다는 식의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운송 수단으로 바퀴를 이용하지 않으면서도 높은 수준을 보여준 문명권들도 존재했다. 바퀴의 사용은 인류문명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였다기보다는 특정한 문명권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특수한 요소였던 셈이다.
3. 그리스 자연철학의 시작
일반적으로 과학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고 일컬어진다. 자연 현상을 자연적 원인으로 설명하고, 자연을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는 전통이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학문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동시에
철학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에 '자연 철학'이라고 불린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도시 국가라는 자유로운 정치 체제 아래에서
토론하는 전통이 싹틀 수 있었고, 해상 무역 활동의 혜택으로 비실용적인 지식을 추구할 수 있을 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색한 내용은 상당히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과학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이 세상을 만든 근본 물질은 무엇인가?', 또 '그 근본
물질에서 어떻게 다양한 물체와 현상들이 생겨나는가?'라는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 탈레스는 물을, 아난시만드로스는 무한자를,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근본 물질로 제시하였다. 파르메니데스와 같이 어떤 물질이 다른 어떤 물질로 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한편
엠페도클레스는 흙, 물, 공기, 불의 네 가지 물질이 근본물질이며, 네 가지 근본 물질은 변하지 않고 이것들이 섞여서 여러 가지 다른 물체가
된다고 주장하였고, 데모크리토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히 많고 다양한 원자들이 모여서 갖가지 물체를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은 서로의 주장을 비판하고 더 나은 주장을 만들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면서 학문의 수준을 끌어 올렸다. 그리스 자연 철학의
진정한 과학적 의의는 이런 점에 있다고 하겠다.
4. 피타고라스 정리의 발견
고대 그리스 수학의 발전은 피타고라스 학파로부터 시작되었다. 피타고라스는 '피타고라스 정리'로 유명하긴 하지만,
이 정리를 그가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아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삼각형이 세 변의 길이의 비가 3 : 4 : 5나 12 : 13 :
5이면 그 삼각형은 직각 삼각형이라는 사실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각 삼각형의 정리'를
'피타고라스의 정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이 정리를 처음으로 증명하였(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사상 최초의
'증명'이었다. 즉, 피타고라스는 논리적 증명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기술에 가까웠던 산술이나 측량술을 수학의 차원으로 끌어올린사람이고,
그래서 그를 '수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피타고라스 자신이나 그의 제자들은 오늘날의 수학자들과 사뭇 달랐다. 그들은 강한
종교적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은 종교적 믿음과 섞여 있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학문은 종교와 수학이 뒤섞여 있는 것이었지만, 자연의 만물에는 자연수로 나타낼 수 있는 조화 또는 비율이 있다는 그들의 신앙은 자연을 수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신념을 남겼다. 이것이 피타고라스 학파의 제일 큰 공헌이었다.
5. 금속의 발견
인류가 획득한 여러 가지 기술 중에서도 금속의 사용은 재료의 면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금속은
석기에 비해 가공성이 뛰어나고 외부의 강한 충격에도 견딜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금속 중에서도 인류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은 청동과 철이다. 이것은 인류 시대가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로 나누어진다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시작되었고 철기 시대는 기원전 5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20세기 이후에 플라스틱이나 세라믹과 같은 신소재가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긴 하지만 철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를 통하여 인류는 처음으로 금속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금속을 생산하려면 독립적인 전문가가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청동기 시대에는 장인 계층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청동은 희귀한 금속이었기
때문에 청동의 용도와 사용자는 매우 국한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철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가격도 저렴하기 때문에 매우 폭넓게 사용되었다. 철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귀족이나 장인을 넘어 평범한 농부도 금속으로 된 도구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철기 시대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다.
6. 고대 원자론
고대 그리스에서는 근본적 원소의 존재 여부에 대한 토론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가 주창했던 고대의 원자론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온 세계는 아주 작은, 무한히 많은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 원자들은 진공 속에서 계속해서 움직인다. 또한 이 원자들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러 크기, 모양으로 무한히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또한 물질은 구성 원자들이 배열된 모양과 구조,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성질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이들이 주장한 원자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를
무수히 나눈 것이기 때문에 원자론은 존재론적으로 파르메니데스의 견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한히 많은 원자들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고대 원자론자들은 비결정론적이고 무신론적인 견해를 표방했다.
고대 원자론은 본질적으로 정량적, 실험적 연구나
수학적인 추리의 산물이 아니라 사색과 직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현대적 의미의 과학적 이론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목적론적인 입장과 신을
배제하고, 우연을 인정치 않으며, 모든 운동을 필연적인 상태로 보는 기계적인 세계관을 채용한 것은 근대 물리학의 방향과 일치한다.
7. 히포크라테스의 의술
고대인의 의학은 기본적으로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아 '죄에 대한 벌'로 질병을 보는 도덕적 질병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기원전 약 460∼375년경)는 질병을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스 코스 섬 출신 의사인 히포크라테스의 주장과 그를 따른 학자들의 주장은 이른바 <히포크라테스 전집>에 남아 있으며 이 전집은
오랫동안 의학의 최고 경전으로 칭송받았다. 오늘날에도 의료 행위에 대한 히포크라테스의 숭고한 직업정신이 본보기로 통하고 있어 의사의 길을 가는
이들은 꼭 한번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하게 된다.
히포크라테스는인간의 질병을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 사체액 사이의
균형이 깨졌을 때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사체액을 각각 사계절과, 공기, 물, 불, 흙 사원소와 습하고 건조하며 뜨겁고 찬 네 가지
성질에 연결시켜 설명하였다. 당시 의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의료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다양한 풍토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였다. 히포크라테스가
인간의 사체액을 자연의 원소와 성질에 연결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히포크라테스가 활동하던 시기의 의사들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 능수능란한 언변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질병을 신들과 연결시켜 대중의 무지와 두려움을 이용하였다. 지금도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하는 것은
히포크라테스가 바로 그러한 의사들의 행동을 비판하면서 신분을 초월하여 환자에 대해 최선을 다할 것과 경험적이고 체계적인 의학 연구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8.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학자였다. 그는 문학 이론부터 역사, 정치학, 논리학, 생물학에
이르기까지 수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더욱이 그는 이 분야들을 하나로 포괄하는 거대한 체계를 만들어 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 철학의 각 분야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지는그의 우주론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우주를 중심에
있는 지구부터 달까지의 지상계와, 달부터 그 위까지의 천상계로 나누었다. 항상 변화하는 지상계는 불완전한 세계여서 시작과 끝이 있는 직선 운동만
있는 반면, 영구 불변의 완전한 세계인 천상계에는 오직 등속 원운동만이 있다. 한편 천상계에는 완전한 원소 '에테르'로 이루어진 천구들이
있지만, 지상계에는 차가움/따뜻함, 건조함/습함의 4가지 성질이 조합된 흙, 물, 공기, 불의 4원소가 지구의 중심부터 무거운 순서대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그는 천상계의 등속 원운동과 지상계의 수직운동을 '자연적 운동'으로, 외부로부터 운동 원인이 작용할 때만
발생하는 운동을 '비자연적 운동'으로 구분하였다. 즉 그의 우주론은 물질 이론임과 동시에 운동 이론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대단히 거대하고 잘 짜여진 체계였다. 이렇게 거대한 체계의 일부를 부정하려면 필연적으로 여러
현상들을 합리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는 다른 이론들까지 문제삼아야 했다. 이렇게 잘 짜여진 체계였다는 점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은 이후
약 2천 년 동안이나 지식인들의 사고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9.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수학책은 단연 유클리드(Euclid, B.C. 259년경 활동)의
<기하학원론>이다. 유클리드가 지은 <기하학 원론>은 천 년 이상 기하학의 고전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기술하는 수학으로 그와 라이프니츠가 만든 미적분법을 사용하지만 정작 뉴턴 자신은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사용하여 자신의 법칙을 증명하였다.
열세 권으로 이루어진 <기하학 원론>은 이전의 여러 사람들, 특히 피타고라스와 에우독소스의 정리를 설명하여 편찬한 고대
기하학의 종합판이다. 기하학을 잘 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이냐는 왕의 질문에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유클리드의 삶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그가 헬레니즘 시대를 살았고 아르키메데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과 알렉산드리아에서 수학을 가르쳤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다.
유클리드는 <기하학 원론> 이외에 몇 가지 다른 저술을 남겼다. <자료론>과 <분할에
관하여>는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기하학의 오류를 담은 <오류론>, 아폴로니우스가 내용을 덧붙인 <원추곡선론> 등은
후세의 주석에 의해서만 전해지고 있다.
<기하학 원론>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이 단순히 도형들에서 발견되는 여러
법칙을 서술한 것에서 벗어나 기본적인 공준과 공리에서 정(리)의를 이끌어 내고 이를 증명하기까지 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방법은 이후 수학적
논증의 기본적인 모델이 되었다.
10. 종이의 발견
종이는 흔히 나침반, 화약 등과 함께 중국의 4대 발명 중 하나로 간주되는 발명품이다. 중국 고사에 따르면 종이는
서기 105년에 후한(後漢) 대의 환관이었던 채륜(蔡倫)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 연구 결과로는 적어도 그보다
250년 이상 일찍 발명되어 기원전 140년경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종이는 처음에는 뭔가를 기록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포장 재료나 의복, 개인 위생용으로 이용되었다. 기록 용도로 종이가 사용되기 시작한 증거는 서기 110년경이 되어야 비로소 찾아볼 수
있다.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는 중동을 거쳐 서유럽으로 전파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제지술은 751년 경 중앙아시아의 슈마르칸트에
전파된 것을 시작으로 바그다드, 카이로, 모로코, 스페인을 차례로 거쳐 서유럽에 퍼졌으며, 14세기에는 서유럽 각지에 종이 공장이 생겨났다.
종이가 널리 쓰이게 됨에 따라 중세 서유럽에서 기록매체로 사용되었던 양피지는 이후 점차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종이는 15세기 이후 발전한
인쇄술과 함께 지식의 대중화 과정을 주도하여 종교개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출처 : http://0114682145.com/
'아이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별이 빛나는 밤… 우주에 빠져 보세요 (0) | 2006.09.19 |
---|---|
초등학교때 해야할 공부9가지 (0) | 2006.08.02 |
아이들 동화책 (0) | 2006.02.17 |
아이들 치아관리 (0) | 2006.01.20 |
[스크랩] 영어동화첵 (0) | 2006.01.19 |